어떤 임산부와 강아지를 만났다.
서로 인사하려는 낌새가 보여 나는 먼저 물었다.
"인사해도 될까요?"
허락을 받았고, 강아지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문자를 받았다.
강아지가 다친 곳은 없지만, 공격성이 있는 개라면 먼저 인사해도 되는지 물어보면 안 되고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고.
문자를 읽으며 한참 생각했다.
공격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래서 물어본 것 아닌가.
인사해도 되는지.
세상에는 미리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묻는다. 상대의 의사를 확인한다. 그게 예의라고 배워왔다.
그런데 문득 이상해졌다. 물린 적이 있는 강아지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보다 보호자일 것이다.
그럼 조심해야 하는 사람도 보호자 아닌가. 인사를 허락한 것도 보호자였다. 그런데 이야기는 왜 "당신이 더 조심했어야 한다"로 흘러가는 걸까. 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보다 추정이 먼저 등장했다는 점이다.
"물린 것 같아요."
그 말에는 이미 상황에 대한 결론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온 문자는 또 다르다.
"다친 데는 없어요."
물린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사실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
놀랐다고.당황했다고.조심해 달라고.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사실보다 추정이 먼저 등장하는 순간 방어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내가 뭘 놓쳤는지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잘못한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상황을 다시 복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출발점은 같다.
나는 먼저 물어봤다.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다친 사람도, 다친 강아지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 이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싫어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다.
책임이 어디 있는지보다, 책임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는 뒤로 밀어두고 상대가 몰랐던 부분을 문제 삼는 것.
자신의 불안은 설명하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설명하는 것.
그리고 이미 끝난 일을 다시 꺼내 누군가를 교육하려 드는 것.
그런 순간마다 사람은 자신을 변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그 기분이 싫다.
사실을 정리하기보다 죄인을 찾으려는 대화가 싫다.
누군가는 놀랐고, 누군가는 당황했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끝난 일 위에 추정을 얹고, 책임을 얹고, 교훈을 얹기 시작하면 사건보다 감정이 더 커진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피로다.
나는 그날 강지를 만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불안을 대신 짊어지고 온 것 같았다.
그게 싫었다.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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