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혼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나는 이혼했다. 지금은 그나마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다. 굳이 이 얘기를 글로 옮기는 이유는 내 스스로에게 있다. 블로그에 약간의 포스팅을 하면서 내가 느낀 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었고, 생각보다 글이 주는 장점에 있었는데 이 생각이 글로 전환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적나라하게 블로그를 통해 쓸까말까 했던 내 아리까리*한 생각,이 이혼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써보고 나면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이기심 때문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블로그가 익명이라 해도, 이혼에 대해 얘기한다면 지인들이 포스팅을 보고 나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의견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찌됐든 결과론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내가 헤쳐 나갔으며, 내가 이겨냈기에.
아리까리* 일본어가 아니라 전라도 사투리다. 애매모호하다는 표현, 일본어인줄 알고 찾아봤다.
미래가 예견된 결혼 준비
어쩌다보니 나는 결혼 준비에 한창이었다. 스드메라고 불리는 결혼의 꽃이 내 앞에 성큼 다가와 나를 기다렸다. 평소에도 화장을 즐기지는 않기에 메이크업은 그렇게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레스는 반대였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홀에서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놀라운 사실은 드레스를 매치할 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식장과 뷔페를 알아볼 때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해진 시간안에 모든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지인과 함께 뷔페 식사를 경험했고 웨딩홀 상담을 했으며 드레스를 골랐다. 어쩌면 미래는 예견되었을지 모른다.
어떻게 만나게 됐냐고?
강남, 사당 등지에서 많이 하는 외국어 모임이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남자에게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라고 물었다. 나중에 듣기를 내가 끼를 부린다고 생각했단다. 나는 그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고,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병원에서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같은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방문했던 병원이었다.
나는 해답을 알고 싶어서 밤에 잠을 못 이뤘다. 그 날 따라 나는 집에 일찍 가야했고, 그 모임에서 내가 명함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몇일 지난 날, 버스에서 문자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디서 만난거죠?
단순한 호기심에서 발생된 사건이었지만 나는 끼부리는 여자로 전락했다. (남자는 이걸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리고 나서 연애를 시작했지만 뭐랄까, 순탄치는 않았다.
이혼의 시작.
언제부턴가 이혼해달라는 요구가 생겼다. 술을 먹고 외박을 한 횟수도 잦았고, 연락 없이 시댁으로 건너가 자는 바람에 나는 뜬눈으로 기다리고, 시댁에 도착해 잠든 남자를 대신에 그의 엄마가 문자를 보냈다. "여기서 잔다니, 너도 편하게 자라", 그녀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문자가 끝이었다.
어느 날은 집 앞에 주차한 차량을 빼달라는 전화를 받았는데, 남자의 아버지가 나와 차를 빼기도 했다. 차를 주차하는 것도, 빼는 것도 골목 폭이 넓지 않아 어려웠다. 그 날 나는 영문도 모르고 남자의 아버지의 부름에 갑작스레, 문을 열어 차키를 주었다.
남자가 원하는 이혼의 이유는 힘들다는 이유였다. 결혼을 하고 내가 힘들어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할 시간을 갖고자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반복되는 상황에 나는 점차 지쳐갔으나 이혼은 안된다고 했다. 그는 계속 술을 먹고 투정부렸다. 술은 먹은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냥 지쳤어. 그러니까 이혼해줘. 이미 나는 남자에게 존재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전환점과 변곡점
장손이었던 그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나는 시댁의 제사를 모두 참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지만 시댁의 이해가 있어 업무가 늦게 끝나면 양해해주었고 음식을 모두 준비해두었으며 나는 거들기만 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남자의 아버지와 가끔 등산을 했다. 이혼만 아니었다면, 남자와의 문제만 없었다면 나는 나름 행복한 결혼을 유지할 수 있었을테다.
이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술을 잔뜩 먹고 우리 아빠에게 전화해 얘와 못살겠다고 술주정을 부리고는, 나에겐 니 어미와 똑같은 너와 살기 싫다며 명절에 친정집 앞에 차를 세우고는 너 혼자 들어가라고 날 내려버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향수를 뿌렸다는 이유였다.
요리사라는 이유로, 술을 진탕 마시고 오는 것도, 불안정한 환경에서 쉽게 이직을 하는 것도, 외박을 하는 것도,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도, 우리 아빠에게 전화해 애를 데리고 가라며 술주정을 부린 것도, 명절에 나를 버려두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일도, 요리사라는 이유로 향이나 냄새에 코가 예민하니 향수를 뿌리지 말라했는데, 내가 명절 새 나에게 배인 음식 냄새를 제거하고 나름의 힐링을 위해 뿌린 향수였음을 구차하게 설명했지만 향수를 뿌린 나의 죄는, 이혼에 대한 전환점이자 변곡점이었다.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365일 중에 채 열흘도 되지 않게 밥을 차려주고는 생색을 내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또 술이 문제였다. 언제부턴가 남자는 거실에서 자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들어온 남자는 이불 속에 기어 들어가 히히덕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설거지를 하던 나는 간만에 들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으나 그는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남자는 잠들었고 나는 항상 하던데로 남자의 핸드폰을 충전하기 위해 들었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봤다. 사랑한다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 맨몸을 또 보고싶다는 말이, 당신이 끓여준 콩나물 국을 또 먹고싶다는 말이 써져있었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밤새 울었다. 분노와 배신감이 들었다. 이혼을 안해준다고, 자기가 지쳤다고, 바람을 피나.
이혼의 가속도
나는 그 다음날 변호사를 찾아갔다. 나도 모르게 밤새 자지 못한채 눈이 탱탱 부어 변호사를 만난 나는 또 그 자리에서 티슈를 한 통 다 썼다. 그들이 말했다. 이혼하시죠.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람 핀 걸 알게 된 순간에도, 외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소요됐다. 사실이었는데 사실이 아닌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 때문에 힘들어서 이혼하자고 시댁에 일러바친 것도, 일말의 상의 없이 정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잔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싶지 않았다. 나의 인생에 이혼이라는 단어는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 아빠에게 전화한 날, 그리고 연애때는 괜찮았던 나의 얼굴에 있는 흉터가, 화상 흉터가, 결혼하고 나서는 흉터가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 시댁에서 돈을 줄 이유는 없으니 니 얼굴에 있는 흉터이니 니 돈 주고 고쳐오라고 했던 말이 소장을 접수하고나서야 생각났다.
흉터를 고치고 말끔하게 되면 아이를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얼굴에 흉터있는 엄마를 창피해할 것이고,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며, 그걸로 인해 자신의 아이가 스트레스 받는게 싫다."
몸이 아픈 가족도 나에게 병이 유전될 수 있으니 검사 받아보고 관리하라고 했는데, 결국 그것도 나의 몫이었다. 그냥 다 혼자 해야했다. 결혼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평생의 동반자를 찾았던 나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졌다.
아름다운 이혼의 가치
소장이 접수되고 마지막 변론기일의 법원에서 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나의 변호사는 그런 나를 보며 위로하고 있었다. 남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남자의 변호사가 (남자가 아닌), 상의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남자의 엄마에게로 전화를 했다. 진척되는 상황이나 이혼이 확정된 순간에도, 위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남자는 현장과 전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마마보이였다.
그리고 나보다 한 살 어린 상간녀는 한 뉴스의 계약직 기자였는데, 변호사를 부를 돈이 없어 상간녀의 엄마를 대동하고 나왔다. 갑자기 콩나물 국이 생각났다. 알몸 얘기도.
배신을 당한 건 난데, 마치 법원에서의 그 여자는 내가 상간녀인 것처럼 굴었다. 결국 상간녀도 나로부터 법원에 불려나왔기 때문이었을까. 그 여자는 위축된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법원의 결정이 나온 이후로 나를 계속 째려봤다.
그렇게 길고 긴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행복할거라 생각했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엔 내가 이혼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 소문을 키운 사람은 여자 둘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그렇게 의심어린 눈빛과 물어보고 싶다는 궁금증을 담아 나를 대했다. 이혼이 조정되었음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나고, 나는 변호사와 인사를 한 후 헤어져 담배를 물었다.
그렇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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