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이유/독서 그리고 책.

#89번째 독서 리뷰, <베르타 이슬라> "진실과 상실의 시대"

올라씨 Elena._. 2023. 9. 2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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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타 이슬라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남진희 옮김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감당할 수 있을 거에요. 곧 감당할 수 있게 될 거에요. 

(책 중에서)

 

이 책, 감당할 수 있을까? 

  담배를 필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나보군..  처음 책 표지를 보고 노골적인 흡연 장면이 있어 시선이 갔다. 아무래도 자극적인 소재라면 언제든 누구의 시선이든 받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남자가 아닌, 여자가 담배를 피고 있다는 생각에 "도대체, 왜?" 라는 연이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베르타 이슬라>라는 알 수 없는 명사가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은 신비함을 주었지만, 4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소설양에 무서워졌다. 끝까지 완독할 수 있을까 하는 나름의 고뇌에 휩싸였다. 몇 달전에 구매해놓고 아직도 진전이 없는 <언어의 무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요약 포인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과 비평, 철학의 그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 

처절한 외로움

우주로부터 추방

 

  한 뉴스의 기사에서 본 기자의 한 마디가 새삼스레 생각났다. "진실이 외면받는 상실의 시대", <베르타 이슬라>라는 책이 400페이지에 걸친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가 아닐까.  게다가 소설임에도 비평상을 받았다는 게 선뜻 믿겨지지 않았다. 소설이면 소설, 노벨 문학상이라면 이해했을텐데 일종의 가치평가인 <비평상>을 받았다면 무엇인가 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90일 기한의 교보문고 이북. 마음이 조급했다. 90일안에 읽지 않으면 이 책은 사라진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소설의 흐름(이야기) 

<베르타 이슬라>를 평가한 교보문고의 한 리뷰어는 이렇게 말했다 "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있다. 왜냐면 이 책은 대화형으로 보이는 ", "를 사용하기보다 서술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면 산만함에 이야기를 놓칠 수 있다. 

 

  과부가 된 베르타, 그리고 그녀를 떠나 비밀리에 정보원 역할을 하게 되어, 스스로도 비밀리에, 세상속에 존재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 남편 토마스 네빈슨. 그리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어버린 교수. 그를 채용한 블레이크 스톤과 투프라, 떠난 남편의 공백에 외로움을 느끼는 베르타 주변에 나타난 루이스 킨델란 부부. 시간이 지나면서 베르타는 미망인이 되고, 미망인이 되어야만 하게끔 전개되는 이야기가 토마스의 행방은 어디에 있을지 의문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나와의 공감

<베르타 이슬라>라는 소설에서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글로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주변인으로부터 나와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매우 기뻤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낀 내 감정은 혼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업무 스타일이 FM 이며, 가끔은 융통성업고 고지식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배울 점이 있을거라는 그 말이 도무지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장막 뒤에 숨어있는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해석하게 할 뿐

절대로 자기가 직접 명령을 하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232/425 p

 

 가끔은 스스로 피곤함을 주체하지 못할 때, 혹은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음에도 기척이 느껴져 화들짝 놀랬을 때 나는 놀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매번 그래왔다.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문장을 찾지 못했는데  정신과에서는 이를 '이인증'이라고 불렀으나,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내가 느낀 감정을 하비에르는 그대로 소설 속에 녹여냈는데 아래의 문구다. 

 

엄청 놀랐다가 갑자기 피곤이 밀려오면서 경계심이 풀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경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어지면서 일종의 몽롱한 상태에 빠진다. 31/425 P

 

도마뱀의 꼬리.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금세 다시 자라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채워질 텐데, 뭔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누가 기억하겠어? 184/425P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 했지만 언제나 전쟁은 있어. 눈에 보이는 전쟁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말이야. 232/425p 

 

 

도마뱀의 꼬리는 잘리지만 금새 다시 생긴다. 잘렸다는걸 모르는 이가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잘렸다는 걸 평생 모를 수도 있다. <베르타 이슬라>는 400페이지에 걸쳐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명확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토마스는 명확하지도 않지만, 정보부의 비밀 정보원으로 일한다. 탁월한 언어능력 때문이다. 상대의 말과 말투, 그리고 언행에 대해서도 금새 복사해 흉내내는 그의 남다른 기술과 언어 습득력은 정보부에서 눈독을 들일만 했다. 여튼, 정보부의 누군가로 인해 토마스가 그 일을 하게 되었을텐데 막상 정보 요원들은 '누가 사주 했느냐'라는 토마스의 질문을 회피한다. 토마스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일을 했고, 본인의 삶을 버려야 했다. 그런데 누가 시켰을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들에게 직접 의견을 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세상은 금새 마비될 것입니다. 267/425p

너무 순진하게 굴지 말게. 얼마나 숨겨야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74/425P 

 

사실 당신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대가로 돈을 받는 거죠. 국가는 기생충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많은 불만을 잠재울 수 있으니까. 274/425p

 

비평의 이유

'나눈다'라는 뜻을 가진 비평은 그리스어다.  <베르타 이슬라>라는 소설을 감상한 평론가들이 가치 점수를 높게 매겼다는 말이다. 번역자가 후반에 언급했듯이, 미처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채로 70세의 생을 마감한 하비에르 마리아스. 그의 이 소설을 읽은 후에 나는, 찬사를 보낸 비평가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니라고, 소설이 무슨 비평이냐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략)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남편의 부재에 대한 아내의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을 보여줌으로써 전작이 보여준 이해의 무게를 뛰어넘고 있다. (중략)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소외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중략)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 국가의 필요와 강요가 망가트린 개인의 삶, 애국심의 의미. 전체 사회의 이익과 개인의 삶. 배신과 이중성 그리고 기만. (중략)  옮긴이  

 

  <베르타 이슬라>는 작가인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성장 시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활했고 프랑스의 군림아래에 있었던 스페인 정부와 시민들의 전쟁, 미국과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ETA(스페인의 바스크 분리단체)와 IRA(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등을 비롯한 다양한 현실의 쟁점을 소설 속에 녹여내어 현실감과 박진감, 그리고 답답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구구절절 서술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드는 혼란스러운 생각, 답답하기만 한 세상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담아내어 다소 읽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오히려 가볍게, 생각하고 소설이라는 마음으로 읽으면 가슴 깊숙히 '비평의 찬사'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끝내며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소장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장의 알람이 팝업으로 뜨면서 실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생일선물로 사달라 졸랐다. 

 

  지난 8월에 읽은 책 중 <모든 삶이 흐른다>가 나의 소중한 책으로 자리잡았는데, <베르타 이슬라>는 9월의 책 중 베스트다.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원래의 언어가 주었던 울림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번역가의 말에, 나는 또 다시 스페인에 관심을 가져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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